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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존 윌리엄스, 출판 : 알에이치코리아(RHK), 출간일 : 2020년 06월 24일
나의 한줄평
그의 삶을 관음 하며 느껴지는 연민
리뷰
아주 예전에 쓰인 소설이다. 어쩌다 눈에 띄어서, 쓰인 지 60여 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보통 소설이 초반부부터 몰입하게 만드는 전개나 사건이 많은 것과 다르게 이 책은 처음엔 이게 무슨 지루한 내용인가 싶어서 읽는 것을 관둘 뻔했는데, 이상하게 중반쯤부터는 묘하게 계속 읽게 됐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조용하고 소박한, 조금은 굴곡진 그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잔잔하게 젖어들어간다. 많은 평론가들이 극찬을 했다는데 난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하긴 어려워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같다. 얼마 전에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봤었는데, 그 영화와 오묘하게 비슷한 결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이 책을 감명 깊게 본 사람이라면 그 영화도 함께 봐보길 추천한다.
원문이 영어로 된 책이기에 한글로 읽는 나의 입장에서 온전히 그 표현이 받아들여졌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표현과 문구들을 남겨본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입대하는 건 군대에 가고 안 가는 것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세상을 한 바퀴 획 돌아보고 이 폐쇄된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는 서서히 사멸해 가는 운명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스토너는 자신이 몸에서 빠져나와 냉정한 태도로 치명적인 질문들을 계속 던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흡연실에서 언뜻언뜻 화제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 싸구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젊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가씨와 사귀면서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 젊음을 향해 원숭이처럼 서투르게 손을 뻗는 비루한 중년남자.
부드러운 애정과 조용한 생활을 갈망하는 본성이 무관심과 무정함과 소음을 먹고 자라야 했다. 그런데 그 본성은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그 이상하고 유해한 환경 속에서도 사나움을 얻지 못해서 자신에게 맞서는 잔혹한 세력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고 그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 작게 웅크린 채 고독하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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